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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후기] 제노사이드
    책으로 공부하기 2026. 5. 24. 11:56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을 통해 저자의 필력을 알게 되었고, 워낙 평이 좋아 다음 작품으로 《제노사이드》를 읽게 되었다. 제노사이드란 특정 집단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되는 집단학살을 뜻한다. 이 소설을 통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작품 자체의 압도적인 몰입감과 재미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집단학살의 비극을 깊이 있게 마주할 수 있어 무척 유익했다.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먼저, 용병 예거는 희귀병(폐포상피세포 경화증)을 앓는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임무에 뛰어든다. 계약서에 서명한 후 알게 된 임무는 충격적이었다. 콩고 분지에서 전염성과 치명성이 극도로 높은 바이러스가 발생했으니, 피그미족과 인류학자, 그리고 함께 있는 생물체 모두를 말살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실체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류를 초월한 고지능을 가진 '신인류' 아기였다. 미국 대통령 번즈는 이 지적으로 우수한 존재가 인류의 패권을 위협할 것이라 판단해 말살을 명령한 것이었다. 결국 인간적인 고뇌 끝에 인류학자와 용병들은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또 다른 축인 일본에서는 평범한 약학 대학원생인 켄토가 등장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비밀스러운 임무를 이어받아 신약 개발에 착수한다. 신인류 '아키리'가 구축한 프로그램을 전송받아 인간의 두뇌로는 불가능했던 불치병 치료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켄토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위험 속에서도 아픈 아이들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어 지내며 약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작품은 인류가 역사 속에서 자행한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조명하며, 인간은 자신보다 우수하거나 이질적인 집단을 제거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유지하려는 잔혹한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들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이들의 상반된 행동을 보며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두 인물의 시점이 교차하는 서사 구조 덕분에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대비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또한 '누스' 혹은 '아키리'라 불리는 이 고지능 생명체가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지 궁금하면서도, 만약 현실에 이러한 존재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우리의 생존은 안전할지,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 같은 현실적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쩌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 구인류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공존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나갈지는 온전히 구인류의 책임이자 역할일 것이다. 더불어 '사카이 유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따뜻한 온기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지능의 높고 낮음을 떠나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서로에게 얼마나 필수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힘을 어디서 얻는지를 다시금 되짚어보게 되었다.

     

    책을 덮은 뒤 '제노사이드'를 직접 검색해 보며 르완다 대학살, 보스니아 내전, 나치의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만행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콩고의 피그미족이 실제로 존재하며, 뒤따라오는 동료들을 위해 나뭇잎으로 길을 표시하는 문화나 밤마다 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며 유랑 생활을 하는 모습 등이 실제 그들의 삶을 정교하게 고증한 결과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미국 대통령 번즈의 자국 이기주의적인 태도와 냉혹한 사고방식은 현실의 몇몇 지도자들을 연상시켜 섬뜩함을 자아냈다. 현실적인 배경 위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허구의 이야기이기에, '만약 이런 일이 지금 지구상에서 진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공포 섞인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한편, 과학계 현실에 대한 묘사를 보며 우리나라의 연구 환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R&D 예산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국내 과학자들은 과연 무엇을 동기부여 삼아 연구를 이어가는 것일까. 현실적인 생계나 안정적인 직업도 중요하겠지만, 누군가는 소설 속 켄토처럼 '내가 만든 기술로 세상에 없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작은 희망과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마치 무모해 보이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창업가들처럼 말이다.

     

    솔직히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군사 기술, 컴퓨터,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이 매우 밀도 있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치밀한 과학적 고증과 국제 정치학적 역학 관계가 정교하게 맞물리면서,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보는 듯한 웅장함을 느꼈다. 저자가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조사하고, 공부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좋은 필력과 창의력뿐만 아니라, 방대한 지식을 흡수하는 끈기와 이를 엮어내는 종합적인 능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용병들과 과학자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며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직을 자주 하며 매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나로서는, 서로 다른 경험과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기존의 생태계 속에서 부딪히고 융화되며 살아가야 하는지, 공존과 조화를 생각하기도 했고, 새로운 집단을 배척하는 것이 원래 있던 집단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녹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 재밌는 책이었다.

     

     

    참고문헌 :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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